연수원 [TPT] 로드리, "축구에 감사한다"
나는 항상 시티에서 내 동료들에게 말한다.
나는 영국식 영어가 아닌 미국식 영어로 말한다고.
걔들은 나를 정말 많이 놀린다. ㅎㅎ
'힙하다' 라는 것 때문인지 옷입는 걸로 자주 놀린다.
가끔은 내가 말하는 방식 때문에 놀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에 대해 모르는 것들이 많다.
사실 나는 맨체스터나 런던에서 영어를 배우지 않았다.
미국 코네티컷 주의 숲 속에서 배웠다.
그래서인지 난 미국식 영어가 편하다.
‘아이노우~, 매앤~. 헤이요~. 하우유두잉?, 브로?’ (대충 이런 식으로..)
알다시피, 우리 가족에게 교육은 정말 중요했다.
아버지는 내가 1년 동안 미국 고등학교에서 교환 학생으로 지내길 원하셨다.
하지만 축구에 대한 내 꿈 때문에 그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내가 14살이 됐을 때, 코네티컷 숲 속 한가운데에 있는 여름 캠프에 갔다.
‘코네티컷’이라는 이름 자체도 마드리드에서 온 아이에게는 엄청 이상하게 들렸다.
근데 도착했을 때 마치 할리우드 영화 속으로 들어간 기분이었다.
호숫가 캠프에서 나무로 만든 카누를 타고, 나무를 타고 오르며, 텐트에서 자고,
나무 막대로 불을 붙이는 그런 영화 있잖아? 진짜 그랬다.
마시멜로와 비스킷을 불에 구워 먹는 것도 했다.. 초콜릿이랑 같이 ㅎㅎ
스모어! 정말 끝내줬다.
핸드폰도 없고, 와이파이도 없었다.
새로운 나라에서 혼자 친구를 사귀려고 했다.
‘안녕, 나는 로드리고야. 나는 마드리드에서 왔어.’
나는 항상 서툰 영어로 말했다.
‘얘들아, 우리 축구 언제 할거야?’
‘그래, 로드리고. 좀 이따가 할 거야. 우린 돼지 가죽(럭비공)을 던질 거야.’
난 생각했다. ‘돼지 가죽??’
‘브로, NFL 같은 거야.’
솔직히 말해서, 꽤 재밌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말했다.
‘얘들아, 나 축구(soccer)하고 싶어.’
‘사커? 사커는 안해, 매앤~.’”
더 안 좋았던 건 내가 2010년 월드컵이 시작되던 시기에 거기 있었다는 거다.
인터넷도 확인할 수 없어서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메인 오두막 사무실에 작은 컴퓨터가 있었는데,
매일같이 캠프 직원들에게 누가 이겼는지 물어봤다.
스페인이 첫 경기에서 스위스에게 졌다고 했을 때, 그들이 나를 놀리는 줄 알았다.
‘스위스? 진짜로요?? 제대로 구글링 한 거 맞아요???’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서 스페인은 점점 더 잘하기 시작했다.
토너먼트에서 계속 이기고, 독일과의 준결승이 다가왔을 때 난 미칠 지경이었다.
아마도 그때 카누 여행 중이었을 거다.
계속 직원에게 ‘제발, 제발 점수 좀 확인해줘요’라고 부탁했었다.
마침내 우리가 오두막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나에게 말해줬다.
‘스페인이 결승에 진출했어.’
난 그때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동시에 집이랑 가까이 있는 기분이었다.
결승전을 보기 위해 직원에게 그의 컴퓨터로 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빌려준 컴퓨터는 10인치 정도 되는 화면이었다.
당신도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 작은 노트북 있잖아?
딱 그거였다. 정말 작았다.
하지만 난 생각했다.
‘아름답다. 상관없어. 그냥 보게만 해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숲 한가운데 있었으면서도 합법적이지 않은 스트리밍 사이트를 찾아서 결승전을 봤다.
미국인들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니에스타가 골을 넣었을 때 나는 정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밖으로 뛰쳐나가 호숫가를 전속력으로 달렸다.
‘바아아아모오오오스!!!! 아아아아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비바 에스파냐!’
미국인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저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들은 나를 보면서 ’잠깐, 스페인 애가 울고 있는 거야? 그 사커 때문에?’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들은 내게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를 미쳤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내가 진짜 미쳤었을지도 모르고…
나는 평생을 두 세계 사이에서 살아왔다. 하나는 축구, 다른 하나는 ‘진짜 세상.’
가끔 동료들이 나를 ‘평범’하다고 놀린다.
재밌는 건, 만약 내 여자친구나 심지어 우리 엄마에게 물어본다면,
그들은 내가 정상과는 가장 거리가 멀다고 말할 거다.
축구에 관해서는, 나는 완전 중독자다.
내가 ‘평범’이라면, 그건 아마도 소셜 미디어나 400파운드짜리 운동화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페라리가 타고 싶으니 축구 선수가 되고싶어!’ 이런 생각을 했던 게 아니었다.
내가 존경하는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보여준 플레이가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했다.
다섯 살 때였던 게 기억난다. 우리 동네에 공동 수영장이 있었고, 작은 정원도 있었다.
여름이면 축구, 수영, 축구, 수영. 점심 먹으러 집에 갔다가 다시 수영장...
열 살이 됐을 때, 경기에서 잘 못하면 하루 종일 부모님과 대화할 수가 없었다.
너무 속상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얘 왜 이러는 거야? 그냥 게임일 뿐이잖아?’ 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나에게는 거의 약물 같은 거였다.
그래서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하나의 약속을 했다.
우리가 이걸 말로 한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해된’ 약속이었다.
내가 축구의 꿈을 추구하고 싶다면, 대학에도 가야 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17살 때, 나는 마드리드를 떠나 비야레알로 이사 갔고, Jaume I 대학에도 등록했다.
첫 해에는 비야레알 아카데미의 기숙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18살이 되면 ‘늙었다’고 간주되어, 스스로 아파트를 찾아야 했다.
엄마가 아이디어를 줬다.
‘왜 그냥 대학 기숙사로 들어가지 않고?’
그래서 그렇게 했다.
영국에서도 비슷한 것 같다.
큰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공용 세탁실, 샤워실, 카페테리아가 있고 문, 문, 문이 나란히 있다.
이웃들이 옆에 쭉 붙어 있다. 나는 나만의 작은 방에 나무 침대, 나무 책상을 두고 살았다.
TV나 플레이스테이션도 없었고, 그냥 노트북만 있었다.
아침에는 비야레알에서 훈련을 하고, 오후에는 수업에 가고, 밤이 되면….
밤은 재미있었다.
왜냐하면, 당연히 그곳은 대학이니까..
금요일 밤이면 모두 클럽에 가려고 했다.
근데 먼저, 미국식으로 말하면 ‘프리’를 했다.
작은 방에 모여서 음악을 틀고 맥주를 마시면서 한 방에 20명이 모여 있는 거다.
침대, 바닥, 어디든 앉아있고, 나도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행동했다.
다들 내가 축구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탄산수 들고 같이 있다가 시간이 되면 그냥 사라졌다.
결국 누군가가 ’로드리고, 너 왜 항상 우리랑 같이 안 가? 좀 와라, 이 친구야.’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사실 나 축구 선수야. 아침에 훈련이 있어.’
그러니까, ‘지루해~~~ 이 친구야, 노잼~~.’
완전 놀렸었다. ㅎㅎ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직 2군에서 훈련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도 없었다.
학생 기숙사는 비야레알 훈련장까지 차로 15분 거리였는데, 매일 택시를 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트램역까지 가서, 트램에 자전거를 싣고, 남은 거리는 자전거로 갔다.
결국 면허를 따고 아버지한테 말했다.
‘3,000유로가 있으니까 차 좀 찾아주세요.’
다음 날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좋은 차 하나 찾았어. 어떤 할머니가 파는 차인데, 4,000유로를 원하지만 컴퓨터가 달려 있어.’
나는 ’와우, 컴퓨터? 거래 성사!’라고 생각했다.
차를 가져오셨는데, 오펠 코르사였다. 차에 타보니까 ‘컴퓨터’ 화면이 8센티미터쯤 됐다.
화면을 탭하면 라디오가 켜지는 기능뿐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엄청 감탄했다.
매일 훈련 갈 때 그 차를 몰고 다녔는데, 완전 자랑스러웠다.
팀 동료들이 나를 놀렸지만, 신경 안 썼다. 난 그 차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다음 해에 라리가 첫 경기를 뛰었고, 내 학교 친구들은 좀 충격받았던 것 같다.
그들이 TV로 경기를 보고 있었는데, 복도 끝에서 사는 그 친구가 화면에 나온 거다.
자기들 회계학 수업에서 봤던 그 친구가 경기장에서 No. 6을 달고 뛰고 있었던거다..
그들은 그게 진짜 나라는 걸 믿지 못했다.
“잠깐, 진짜 걔 맞아?”
“구글 검색해봐, 어서 구글링 해봐.”
“아니야, 그 로드리고가 아닐 거야. 로드리고라는 이름은 많잖아. 걔 아닐 거야.”
축구 유니폼을 입고 TV에 나오면 좀 다르게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아마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다.
그래서 몇몇은 확신했다.
"아니야, 걔 절대 아니야.”
그러다 점점 경기에 더 많이 출전하게 되면서 그게 정말 나라는 걸 알게 됐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야, 도대체 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어젯밤에 바르셀로나랑 경기했잖아!”
그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대학에 돌아가면 내 뇌가 자동으로 다른 세계로 전환되는 것 같았다.
학교는 축구의 압박감을 잊게 해줬다.
또 하나 멋진 점은, 그 기숙사에서 내 여자 친구를 만났다는 거다.
그녀는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내 축구에 대한 스트레스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하... 셀타 비고와 비긴 경기에 대해서는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내 발을 땅에 붙여놨다.
“진정해, 응? 진정해.. 그거 그냥 축구야.”
그리고 내 선생님들 눈에는 내가 그냥 “또 하나의 학생”이었다.
스페인에서는 대학은 그냥 대학이다. 당신은 공부하러 거기에 가는 거다.
그래서 작은 방에서 내 노트북과 함께 있을 때, 난 완전히 몰두해서 다른 모든 걸 잊곤 했다.
어느 날, 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놨었다.
이후, 잠시 쉬면서 확인해보니, 문자 메시지가 20개, 왓츠앱 메시지가 50개, 부재중 전화가 10통이나 와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오 마이 갓.. 누가 죽었나? 무슨 일이야?
팀 동료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왔다.
“로드리, 너 어디야?”
“어디라니? 나 여기 있어. 대학이지.”
“감독님이 널 찾고 있어. 모두가 널 찾고 있어.”
“무슨 소리야?”
“발렌시아랑 경기해. 우리 다 버스에 있어.”
나는 그들이 장난치는 줄 알았다.
“에이, 그 경기 내일이잖아……”
오 마이 갓.... 아니...
어느날 학교에 등교했는데 그날이 시험치는 날이란 걸 잊고 있던 상황이랄까?
그게 나한테 실제로 일어난 거다.
근데 학교가 아니라, 라 리가였다.
“알겠어, 일단 버스 그냥 출발해. 호텔에서 만나.”
그날 정말 빠르게 옷을 입고 차로 달려가서, 내 오펠을 타고 제임스 본드처럼 거리를 질주했다. 호텔이 발렌시아에서 한 시간 거리였는데,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팀 회의가 시작됐고,
난는 마치 “숙제 하는 거 까먹었다..”라는 표정을 하고 들어갔다.
하하하.. 축구에서도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그날 나는 혼쭐이 났지만, 그럴만 했다.
그건 나에게 큰 교훈이었다.
나의 두 세계를 더 잘 관리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여정에서 모든 단계마다, 나는 실패를 통해 배웠고, 새로운 것을 추가했다.
또 하나의 퍼즐 조각..
비야레알에서, 나는 단순한 축구 선수가 아니라 프로가 되는 법을 배웠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돌아가 한 시즌을 보냈을 때, 나는 진정한 경쟁이 무엇인지 배웠다.
비야 레알에 있을 때 나는 발밑 기술이 뛰어났지만, 여전히 조금은 부드러운 선수였다.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 아래에서 나는 경기장에서 ‘나쁜 놈’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거칠어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상대 팀을 90분 동안 괴롭히는 방법을 터득했고, 이것 또한 중요한 배움이었다.
그 다음 여름에 시티로 이적할 기회를 얻었을 때, 나에게는 꿈 같은 일이었다.
이적을 결정하기 전에 세르히오 부스케츠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펩? 그는 너를 더 나은 선수로 만들어줄 거야.
하지만 계속, 계속, 계속해서 널 밀어 붙일거고, 너에게 끝이란 절대 없을거야.”
부스케츠는 펩과 같은 역할(6번)을 했었고,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기에 나는 그의 말을 크게 신뢰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완전히 옳았다.
펩의 독특한 점은 항상 한 발 앞서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경기 자체가 진화하기 전에 먼저 진화한다.
지난 시즌과 똑같이 플레이하는 것에 절대 만족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쟁자들은 항상 지난 시즌을 분석하기 때문이다.
프리미어리그에서 4연패를 달성하려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스스로를 재발견하지 않으면 끝나는 거다.
알다시피, 펩을 언급할 때마다 나는 항상 손을 써서 설명하게 된다.
테이블이나 보드 같은 걸 찾아서 커피잔을 체스 말처럼 움직이며 그가 하듯이 설명한다.
“그가 여기로 가고, 저기로 가고, 그리고 빵, 네가 여기로 이동하는 거야. 공간 속으로. 빵.”
그는 나에게 퍼즐의 마지막 정신적 조각을 더해줬다.
경기를 다르게 ‘보는’ 법, ‘느끼는’ 법, 언제 공간으로 움직여야 하고, 언제 물러서야 하는지..
언제 압박해야 하고, 언제 쉬어가야 하는지..
그의 자신감은 내게 정말 중요한 요소였다.
왜냐하면 2019년에 내가 이 팀에 합류했을 때,
페르난지뉴, 아구에로, 다비드 실바, 케빈 더 브라위너 같은 전설들이 있는 라커룸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12살이었을 때 아틀레티코에서 훈련 중인 아구에로를 보러 가곤 했다.
그는 내 영웅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이제 라커룸에서 그와 나란히 앉게 된 거다.. 정말 놀라웠다.
아구에로와 오타멘디는 사실 내 옷 스타일뿐만 아니라 매 경기 후에 여자 친구와 페이스타임을 하던 나를 항상 놀리곤 했다.
나는 축구 선수고 그녀는 의사라서 오랫동안 장거리 연애를 해야 했다.
장거리 연애는 어떻게 하냐고? 페이스타임을 한다.
나는 매 경기 후에, 승패에 상관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기면 문제가 없었다. 선수들이 떠들고 축하하느라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져도, 나는 여전히 평소처럼 행동했다.
여자 친구와 이야기할 때는 뇌가 대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로드리고가 되는 거였다.
버스 안은 죽은 듯 조용하고, 모두 고개를 숙이고 우울해할 때도 나는 크게 말하곤 했다.
“응, 오늘 좀 엉망이었어. 그래, 그래, 비겼어. 응, 열받지… 어쨌든, 너는 오늘 뭐했어?”
처음에 아구에로와 오타멘디가 나를 따로 불러서 말했다.
“야, 버스에서 그렇게 말하면 안 돼! 펩이 듣고 있을 거야! 모두가 듣고 있어!”
하지만 경기가 끝난 후엔 늘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괜찮았어. 이기긴 했는데, 내가 좀 엉망이었어. 넷플릭스 보고 있어? 뭐 먹고 있어?”
하하하. 우리는 마치 10대들 같았다.
모두가 짜증 내곤 했다. 그들은 내 전화를 뺏으려 했다.
“나중에 다시 전화해! 로드리, 전화를 끊어! 지금 가야 해! 바이바이!”
나를 죽이고 싶었겠지만, 나는 상관없었다.
경기장을 떠나면 항상 내 발이 땅에 붙어 있는지 확인하는 게 내 목표였기 때문이다.
가끔은 사람들이 그런 내 모습을 오해하는 것 같다.
물론, 축구선수로서 많은 미디어와 마케팅이 선수의 캐릭터를 만들어버린다.
나 같은 경우는 “너드” 캐릭터이다.
기억나는 게, 한 번은 화보 촬영을 해야 했는데, 그들이 그랬다.
“이거 멋있을 것 같아요! 책 몇 권을 팔에 끼고 도서관에 가는 척해보세요.”
사진이 나오고 나서 학교 친구들이 메시지를 보냈다.
“야, 진짜냐? What is this shit? 너 책도 안 좋아하잖아! 너 너드도 아니잖아!”
소셜 미디어에서 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항상 기억해야 한다.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지난 몇 년 동안 시티에서 많은 축복을 받았지만, 그게 진짜 인생은 아니다.
좋은 순간에선 배울 게 없고, 그냥 즐기기만 한다.
하지만 정말 고통스러운 순간, 진짜로 고생할 때 그때야말로 진정으로 성장하게 된다.
2021년 첼시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 후, 가족들이 있는 작은 공간으로 돌아갔을 때를 기억한다.
부모님과 형제들을 봤을 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다시 10살이 된 것 같았다.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생각했다.. '다시는 이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 더 열심히 해야 해, 더 나은 방법을 찾아야 해..'
지금 우리가 챔피언이 되고, 세상의 정상에 있을 때는 그 2021년의 순간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일 것이다.
좋은 순간 뒤에는 항상, 평생의 고난과 경험이 숨어 있다.
심지어 2023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골을 넣었을 때도 그것은 계산된 행동이 아니었다.
그건 20년간 축구를 하며, 정원에서 축구를 하던 시절부터 몸에 배어 있던 감각이었다.
베르나르도가 크로스를 올리기 전, 나는 실제로 그 플레이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TV 리플레이를 보면 나를 볼 수도 없다. 공이 내게 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나는 박스 쪽으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이유는 모른다..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0번 중 9번.. 아니, 100번 중 99번, 베르나르도가 크로스를 올리면 공은 내 쪽으로 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순간 내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이 바로 그 때야.”
그래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공이 굴절되었다.
내가 그 한 발을 떼지 않았으면 이미 늦었을 거다.
공이 내쪽으로 튕겨 나왔다.
그때 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모든 생각들을 말할 수 있다.
'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세게 차,
그래, 그런데 일단 기다려. 오늘 경기에서 한 번의 기회가 전부일 수도 있어.
그냥 골대로 넣어.
그냥 공을 네트에 패스해.
왔다. 패스해!'
그 일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났다.
공이 골문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팬들 앞에서 무릎 슬라이드를 하며 달려갔고,
그 순간에 내 첫 번째 생각은 “20분. 20분 더.”였다.
정말 긴 여정이었다.
이것이 바로 No. 6의 마음가짐이다.
그 20분 동안 우리는 고생했지만, 휘슬이 울리자 기분이 정말 최고로 좋았다.
그 기쁨은 단순히 골을 넣었다는 것에 관한 게 아니었다.
90분 동안 팀으로서 고생하고 이겼다는 것, 팬들을 위해 트레블을 확보했다는 것,
나를 여기서부터 응원해준 팬들, 그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보는 것, 가족을 안아주며
“우리가 해냈어.”라고 말하는 것, 이 모든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마약이다. 그것이 바로 축구를 하는 이유이다.
유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승전의 후반전을 벤치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것은 나에게 어떤 면에서 시적이었다.
처음으로 스스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나는 좀 더 리더가 되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나이가 가장 많은 선수는 아니지만, 새로운 세대의 젊은 선수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에게 중요한 순간에서 압박감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 여름 라민 야말과 니코 윌리엄스가 이룬 것들을 생각하면 정말 기쁘다.
그렇게 큰 순간에 국가 전체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17세, 22세에 나서다니.. 믿기지 않는다.
그들이 내 나이였던 때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았다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결승전 후반을 벤치에서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200킬로미터로 달리는 차에 앉아 있는 것과 비슷했다.
당신의 손이 핸들에 있고 당신이 통제하고 있을 때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지만,
승객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이다.
85분에 우리가 골을 넣었을 때, 나는 필드에 있을 때보다 오야르사발에게 더 빠르게 달려갔던 것 같다.
국가를 위해 승리할 때, 그 감정은 다른 종류이다.
나는 내 뿌리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수영장에서 놀던 시절, 정원에서 놀던 시절, 다시 수영장으로 돌아갔던 시절..
자전거를 타고 트램을 타고 훈련하러 갔던 시절..
월드컵에서 우승했을 때, 코네티컷 숲 속에서 기뻐서 눈물을 흘리던 시절로 돌아갔었다..
나는 단지 도시를 행복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전체 국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세대가, 새로 태어난 세대가 그 기쁨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그날 밤, 야말이 프랑스를 상대로 골을 넣었을 때 몇 명의 아이들이 미친 듯이 뛰었는지,
오야르사발이 잉글랜드를 상대로 골을 넣었을 때 몇 명이 뛰었는지.. 수천 명, 수백만 명.
“¡¡¡¡¡jajajajajajajaja!!!! ¡Viva España!”
나는 그 기분을 안다.
순수한 기쁨.
책과 경제학과 회계에 대한 모든 존경을 표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오직 축구만이 그럴 수 있다.
날 교육 시켜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며,
우리를 꿈꿀 수 있게 해준 축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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